“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을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가정에서 TV로 보는 예배에는 sprit과 truth가 없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나님께 정성스런 예배를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예배당에서 가족과 다른 교우들을 만나지 않기 때문에 단장을 하거나 혹은 외모에 신경을 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예배드리는 자의 그 마음을 보시지 겉모양을 보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예배에 정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정성은 마음가짐뿐만 아니라 겉모양까지도 포함됩니다. 머리 손질을 하고 화장을 하고 고운 옷을 입고 예배당에 가고, 샤워를 한 후, 깨끗이 면도를 하고 정장을 하고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청바지 차림에 헐렁한 티셔츠 하나 걸치고, 수염도 깍지 않은 모습으로 TV 앞에 1시간 앉아 예배드리는 것은 결코 정성스런 예배라 볼 수 없습니다.
정성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형식적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정성이 빠진 예배는 이미 예배가 아닙니다. 정성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spirit입니다. 온 정성을 다 쏟아 붓는 예배는 나의 spirit를 쏟아 놓은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를 받으십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 우리 민족은 4,000년 동안 무속 신앙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집안에 어려움이 있을 때, 즉 부모님이나 남편, 자식이 병이 났을 때, 혹은 아들이 과거시험을 보러 갔을 때, 시집 온 지 수년이 지나도 아들은 고사하고 딸 하나도 낳지 못하는 며느리를 위해서 정성을 드립니다.
아침마다 아무도 떠가지 않은 깨끗한 물 한 그릇 떠놓고 동쪽을 향해서 두 손을 비비며 계속 절을 하면서 정성을 드립니다. 그것을 ‘정성을 드린다.’고 말 합니다. 정성을 들일 때, “천지신명(天地神明)이시여, 우리 남편 병 낫게 해 주세요. 우리 아들 장원 급제하게 해 주세요, 며느리에게 아들 하나만 점지 해 주세요.”라고 빌 때, 그 정성이 얼마나 간절한지 옆에서 보는 사람에게까지도 그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빌며 절하고, 또 빌고 절을 하기를 오랫동안 계속 합니다. 정말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서 병도 낳고, 과거 급제도 하고, 아들도 낳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무속 신앙에서 보여주는 정성 정도도 없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다면 그런 예배가 진정으로 sprit과 truth가 들어 있는 예배일까요? 필자는 왜람 되지만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하게 예배를 드리기 위해 집에서 영상을 켜놓고 드리는 예배는 정성이 빠진 예배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예배는 100번 1000번 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코로나-19 문제가 해결되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가 되면, 신자들 모두는 반드시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만 합니다. 집에서 영상 예배로 대신하려는 것은 결코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소원을 간구해야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어 주시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은 예배를 드리면서 간구해봐야 들어 주실 리 만무합니다.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하는데, 편한 쪽을 택해 정성이 빠진 예배를 드린다면 그 예배는 형식에 그친 예배지 진정한 예배일 수 없습니다. 어려움을 헤치고 예배 처소로 향하는 그 자체가 예배의 일환입니다.
초기교회 시절, 로마 관헌에게 붙잡히면 사형장으로 끌려간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어렵게 지하동굴 예배처 catacomb로 향하던 교인들의 예배가 진정한 예배였습니다. 비오고 폭풍이 몰아치는 주일에, 그것을 뚫고 예배당을 향해가는 교우들의 발걸음이 곧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도록 합시다. 샬롬.